내 총이 더 빠르다 - Quick and the dead(1995) 감독: Sam raimi
Quick and the dead의 감독과 배우 프로필을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샘 레이미가 웨스턴을? 의문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B급의 정서를 웨스턴 영화에 어떻게 옮겨 담았을지가 기대 되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이블데드의 애쉬가 나타나서 총 대신 전기톱으로 악당을 응징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도 잠시 빠져보았다.(제목에서부터 이블데드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하니...) 백문이 불여일견. 망설임 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캐스팅에서부터 웨스턴의 전통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물론 영화가 제작된 시기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더 이상 웨스턴은 담배를 문 존 웨인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퀵 앤 데드는 이제는 웨스턴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존 웨인처럼 웨스턴 장르 전속 배우를 기용하지 않고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들로 호화 캐스팅을 했다. 우리에게는 ‘원초적 본능’에서의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장면이 익숙한 팜므파탈 이미지의 샤론 스톤이 여자 총잡이 주인공인 엘런 역을 맡았고, 그 외에도 진 해크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우 등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이는 헐리우드 자본력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캐스팅임과 동시에, 웨스턴의 하나로 공식화된 배우 캐스팅보다 훨씬 다양해졌다는 긍정적인 장르의 변화로 평가된다.
영화는 황량한 황야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주인공이 어떤 악당이 숨겨놓은 금을 탈취하고 가는데 이는 황야의 야만성과 무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야만의 장소에서는 어떠한 약탈과 범법도 허용되는 것이다. 오직 더욱 강한 악당이 살아남을 뿐. 웨스턴식 적자생존의 법칙인 것이다. 하지만 악당은 주인공의 정체를 알고 나서 놀라게 된다. 내 금을 훔친 저 나쁜 놈이 여자라니?
주인공을 여자 주인공으로써 설정한 것은 일반의 웨스턴 장르에서는 꽤나 새로운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이 영화는 비교적 최근인 90년대의 장르영화의 재해석처럼 느껴지는 터라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라고까지 보기에는 힘들다. 아버지를 악당에게 잃고 복수심에 불타서 다시금 예전의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총잡이. 여자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흔하고 닳은 설정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웨스턴의 기본 설정 아닌가. 단지 보통의 웨스턴 영화에서 보이는 유유히 방랑하는 제3자인 주인공이 착취당하고 있는 자신과 관계없는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해 총을 빼드는 것과는 다르게 이미 애초부터 주인공에게 악의 편과 대항할 동기부여가 되어있었고 스스로 그 정해진 목적지를 찾아온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왕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마을은 흔히 그렇듯이 악덕 지주격인 해로드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매기는 등 폭정을 일삼고 있다. 모두들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누군가가 해로드를 죽이고 자신들의 마을에 정의를 세워주기를 원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마음이다. 해로드가 첫 번째 결투에 나서서 상대방을 죽였을 때 마을 사람 모두 박수를 치지 않았고(해로드가 왜 박수를 치지 않냐고 윽박지르자 그제서야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다지 기뻐하는 분위기도 아닌 것에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캔트렐 중사라는 살인 청부업자에게 해로드의 살인을 의뢰하지만 주인공이 아니기에 되려 해로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다시금 새로운 영웅을 기대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이다. 아무도 엘렌이 해로드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하는데, 이미 영화 속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위장했기 때문이다. 웨스턴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자신을 죽음으로 위장하고 악당이 방심한 틈을 타서 나타나서 죽이는 것은 역시 클래식 웨스턴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아닌가 한다. 일반적인 웨스턴에서는 주인공과 악당의 대결구도가 명확하고 모두들 그들간의 싸움에 집중을 하게 되고 주인공이 지면 이 마을도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퀵 앤 데드에서는 아무도 주인공이 해로드와 대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실로 장르의 변주라 할 만하다.
결투로 시작해서 결투로 끝나는 이 영화는 해로드가 결투 대회라는 것을 개최해 마을 안의 모든 총잡이들을 끌어들인다. 사람을 한명 죽일 때마다 에이스카드를 수집하는 에이스, 인디언으로서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다는 스파티드 호스, 사람을 죽일 때마다 팔에 상처로써 각인하는 스카 등 웨스턴에서 볼수 있을법한 모든 총잡이를 모아두었는데, 특히 스카는 존 포드의 ‘수색자’의 인디언 추장의 이름인 스카에서 따온 일종의 오마쥬로 보여진다. 이렇게 결투장면이 많은 이 영화 내에서 결투 장면의 전통적인 관습(Convention)은 아주 효과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시계탑의 시곗바늘이 철컥 움직이는 화면, 주인공의 손이 총에 다가가는 장면, 상대편의 예리한 눈, 관중들의 긴장된 표정, 그리고 단 한발의 총성. 우리에게 익숙한 웨스턴의 결투 장면 그대로였다.
하지만 샘 레이미답게 이런 결투 장면에서도 그만의 B급 정서를 표현해냈는데, 악당 해로드가 캔트렐 중사와 결투하는 씬에서 상대방의 머리 정중앙에 구멍을 내버리는 씬이나 총알을 정통으로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콜트에게 총을 쏘는 스파티드 호스의 장면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스파티드 호스의 장면에서는 얼핏 좀비영화가 떠오르기까지 했다.) 또한, 이런 잔인한 연출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샘 페킨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주효하다는 것과, 새삼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인 엘렌은 웨스턴의 기본적인 ‘개인적이고 난폭하며 흔들림 없는 남자’라는 공식과는 조금 동떨어져 보인다.(단순한 성차이를 넘어서서) 물론 엘렌의 총잡이로써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살인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도 극중에서 연민의 정에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해로드를 암살하기위해 그가 초대한 저녁파티에 참가해놓고 정작 쏴죽이지 못하고 도망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공포는 유진을 빗속에서 쏴 죽임으로써 극복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녀는 좀 더 웨스턴 영화의 주인공에 걸맞는 인물이 된다.
그럼 콜트라는 인물은 어떤가? 콜트라는 신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로써 흥미로운 대상이다. 콜트는 해로드의 동료로 원래 무법자였으나 개과천선하고 신부가 되었으나, 해로드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일반적인 웨스턴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인물이다. 갱생한 신부 총잡이라니 정말 색다르지 않은가? 살인은 죄악이라며 결투 시작 전까지만 해도 기도를 하며 삶을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결투에 들어가자마자 본능에 의해 누구보다 빠르게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은 다시금 피에 젖은 결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세지이다. 최후에 엘렌은 콜트에게 보안관 뱃지를 맡기고 떠나는데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어 이 마을에 질서를 세우고 치안을 유지해줄 보안관으로 남아달라는 의미이며 기존의 영웅-후계자 구도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다. 해로드의 부하 4명을 빠르게 처리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엘렌 보다는 오히려 콜트가 더 총잡이로써의 실력이 뛰어난데다가, 엘렌 보다 콜트가 총잡이로써의 경험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2명의 영웅이 한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명의 영웅은 가고, 한명의 영웅은 마을에 남는 모양새인데, 이 또한 웨스턴의 기본적인 공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이다.
또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분한 키드라는 인물도 주목할 만하다.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한량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해로드를 아버지로 두고 그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뛰어난 실력의 총잡이이다. 악당의 아들로써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뛰어넘겠다니 헐리우드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설정(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와 루크와의 관계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이긴 하지만 웨스턴의 관점에서 보면 이 또한 새로운 인물의 전형을 창조한 듯하다. 주인공에게도 사랑을 고백한 키드는 최후에는 아버지에게 총을 맞고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차라리 이쪽이 끝까지 살아남았다면 주인공과 영웅-후계자 구도가 어울렸을 법한 느낌이다.
영화중 도상(Iconography)은 서부 영화의 기본 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카우보이 모자, 관, 멕시코 축제, 레밍턴, 시계탑, 말, 보안관 뱃지, 인디언, 금니 등등 서부 개척시대의 아이템을 영화 속 소품으로 차용해서 익숙한 웨스턴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러나 과거처럼 흑백영화가 아니기에 흑과 백의 ‘색상의 대립’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물론 해로드는 검은 옷을 즐겨 입긴 했지만 말이다. 엘렌과 콜트는 역시 선과 악이 뒤섞인 인물로써 어두운색의 외투 안에 흰색 셔츠를 입음으로써 복합적인 인물임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해로드 또한 검은 외투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다. 단지 흰 셔츠의 노출 빈도가 낮기 때문에 더욱 나쁜 역할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고전적 웨스턴과는 차별화를 꾀했지만, 실상 겉껍질 외에는 크게 바뀌지도 않은 샘 레이미식 웨스턴은 흥행에 참패했고 평단에서도 혹평을 얻어맞았다. B급 호러 영화의 제왕이 웨스턴에서는 죽을 쑨 셈이다. 결과론적인지는 몰라도 샘 레이미는 이로 인해 분노의 장전을 했고, 그 후로 스파이더맨이나 드래그 미 투 헬 등 흥행에 있어서 성공적이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안티 히어로물이나 B급 호러 같은)로 돌아왔다. 차라리 샘 레이미가 좀 더 장르적 특성에서 벗어난, 맛이 간 B급 웨스턴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더라면, 분명히 샘 레이미의 총이 더 빨랐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