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5. 21:10 개인적취향/영화
 


기담에 대한 장르적 시각에 입각해 분석한 글로써,
우선 한국 공포영화의 토양에 대해 짤막하게 논해보고자 한다.

공포영화, 특히 종래 한국 고전 공포영화라 함은 ‘월하의 공동묘지’, ‘월녀의 한’등 전통적으로 여귀신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로 관객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트리곤 하는데, 이런 한국의 공포영화는 전통적인 한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감정에 사무친 처녀귀신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그에 햡당한 복수를 위해 현세에 귀신이라는 형태를 빌어 귀환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서든 간에 결국 복수를 하고는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전 공포영화는 그 촌스럽고 어설픈 속성 때문에 점차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에 걸맞게 공포영화의 괴물 또한 점차 외부의 공포에서 내부의 현실적인 공포로 옮겨져 온다. ‘하녀’에서의 불륜, ‘여곡성’의 고부갈등, ‘깊은 밤 갑자기’의 불륜 등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 하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이 그 공포의 근원적인 대상으로 여겨지는 영화들이 대거 등장했고, 이는 굳이 귀신이라는 존재가 등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관객들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한국의 가족주의가 무서운 영화 속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또 한편으로는 남성우월적인 시각을 비판하는 측면도 있었다.)



   (上 장화홍련전, 1936년 작  下 장화,홍련, 2003년 작)


한국에서 이러한 공포영화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이너한 장르, 괴짜 장르로 취급되었고 ‘여고괴담’, ‘장화홍련’등의 몇몇 명작만을 제외하고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제는 여름 성수기 시절에 한철 장사로써 반짝 등장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공포물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여고괴담처럼 저명한 넘버링 시리즈 또한 가면 갈수록 통속적인 내용과 문제의식 없는 일본공포영화 따라잡기에 불과한 따분한 패턴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기담은 그런 암울한 한국 공포영화계의 한 가운데서 혜성처럼 나타나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작품성은 좋았으나 결국 흥행은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기담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특히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과 미학적인 영상미가 탁월했는데, 이런 특질은 장화홍련 때부터 점차 동시대 한국 공포영화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아래에 언급될 예시 장면으로써의 아사코. 확연하게 두 장면의 장르적 차이가 느껴진다.)


기담으로 돌아와서 이야기해보자면, 기담은 기본적으로 플래시백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극중 정남은 의대 교수로써 자신의 과거의 끔찍했던 일을 자신에게 보내진 과거의 사진첩을 계기로 회상하게 된다. 기담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모두 같은 한 장소, 안생병원에서 동시간대에 벌어난 일을 각 인물들의 관점에서 보여주는 형식으로 이전 영화들의 연출에 많이 빚을 진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공포영화는 별도의 특정한 연출적 특징이 존재하지 않지만, 조명과 그 어두운 분위기는 질서의 장르에 부합한다. 기담은 이런 특징에 있어 일견 공포영화의 형태(ex.귀신이 등장하는 씬)를 지니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멜로 드라마처럼 아름답거나 슬픈 장면을 그려낼 필요가 있을 때(ex.아사코의 엄마가 새아버지를 아사코에게 소개하는 씬)마다 보조광으로 부드럽게 화면을 표현하는 등 질서와 통합의 장르를 아우르는 양가적 성격을 띄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담속의 괴물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기담은 전통적으로 유교가치관이 지배하며 가부장적인 사회풍토를 가진 일제 치하의 한국사회라는 시대적 배경이다. 기담 속의 괴물은 동양 공포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모두 귀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는데 셋 다 여자의 모습이며, 그 괴물은 영화 내내 ‘어긋난 사랑’이라는 주제로 일관되게 표현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명의 여귀들의(김인영은 실제 사람이지만, 스크린 속에서의 광기어린 모습은 그다지 귀신과 다르게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끔찍한 살인을 일삼는 살인귀이다.) 여성성은 열등성의 표시로써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그렇게 느낄 수가 있었다. 김인영은 개화기 시절, 여권신장에 힘입어 의사가 된 여자라는 엘리트로 설정된 인물이지만 그런 그녀가 정신분열증에 연쇄살인까지 일삼는 살인귀가 된 것은 사랑을 잃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리라. 이는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남편의 죽음은 일본 대장에 대한 수술 집도의 실패에 인한 결과로 이에 대한 원인은 수술 현장에 있던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 과부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지~)


에피소드별로 다시금 분석을 해보자면 우선 첫 번째, 진구의 에피소드는 진구와 죽은 원장 딸의 네크로필리아를 다루고 있었다. 죽은 아오이의 어머니인 원장이 스님에게 진구와의 영혼결혼식이라는 무속적인 절차를 의뢰했기에 그들의 어긋난 사랑의 인과율이 맺어지게 된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일제치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죽은 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시체를 매장하고, 제사를 지내는 유교권 국가에서 시체라는 소재 자체가 일종의 성역이자, 금기시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성적인 터부시 또한 유교적 관습으로써 존재해왔는데 진구는 이렇게 금기시 되는 시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런 시체와 금기시 되는 관계를 맺는다. 이는 윤리적으로 매우 비도덕적이고 불온한 것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한계로 설정된 금기들을 모두 허물어 버린 것은 유교적 관념에서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으로 비추어 볼 때도 상당히 불쾌하고 불편한 성질의 것이다.



(우리 아사코가 달라졌어요)


두 번째 이야기는 엘렉트라 컴플렉스와 공포영화 속에 등장하는 위험한 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아사코가 새아버지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심리적 방황과,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보여준다. 아사코는 새아버지와 관계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버림받았다는 감정에 휩싸여 어머니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한편 새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곧 일가족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참한 방아쇠가 되어버린다. 이 또한 한국적인 가족주의의 관점에서 미루어 볼 때 패륜적이고 끔찍한 일이다. 말 잘 듣고 착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간접적인 살인범, 즉 위험한 아이가 된 것이다. 이는 관객들에게 꽤나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와서 극중에 등장하는 엄마 귀신만큼이나 그 상황에 대한 공포감을 유발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극 중 이수인 또한 아사코를 치료하면서 아사코의 경우와 비슷한 자신의 과거 경험을 떠올리게 되고 사랑인 듯 아닌 듯 뭔가 미묘한 감정이 싹트게 되는데, 이 또한 로리타 컴플렉스로 보게 된다면 역시 어긋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mama, just killed a man~)


마지막은 정신분열증 환자를 괴물로 상정하고 있는데, 자아를 죽이고 이미 예전에 죽은 남편을 자신의 내면에 동일화해서 살아가고 있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라는 이중성은 일제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미루어 볼 때 국내에 거주하는 독립투사와 친일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자문이나(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비인간성,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을 나타낸 것이고 이는 친일파에 대한 은유로 작용해 최후에 죽음으로써 단죄하는 듯 보였다.) 혹은 근대화의 허영 속에 혼란을 겪고 방황하는 인물을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일반적인 정상인과 다른 정신병자에 대한 일반의 적개심일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이 에피소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죽은 사랑에 대한 집착, 위험한 과부를 표현한 이야기이다. 역시 이번에도 메인 테마는 어긋난 사랑이다.

최종적으로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안생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진구와 영혼결혼식을 맺은 아오이도 안생병원에서 또 한번 죽었고, 그리고 자살한 원장과 아사코, 아사코에게 또 다른 감정을 품게 된 이수인, 그리고 김인영. 최종적으로 진구도 안생병원에서 그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어긋난 사랑은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미루어보아 있어서는 안될 규탄적인 성격의 것이고 그렇게 뒤틀린 영화 속의 사랑을 정당화 시킬 수 없기에 그 원인이 된 인물들을 모두 죽이는 보수적인 방법을 통해서 스크린 속의 그들의 파괴적인 욕망을 심판하고 결국 파국적인 엔딩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담은 ‘어긋난 사랑’이라는 금기시하고 억압되었던 타자의 귀환을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소멸시키고 거부하면서 다시금 억누르는 공포영화의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분석은 했지만 사실 기담은 공포영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슬픈 로맨스 드라마
같았다. 보고 무섭다는 느낌보다는 슬프고 적적한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김인영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쓸쓸하구나...”


만루 끝내기 홈런 타자(打者)의 귀환을 기다리는 한국 공포영화계의 텅 빈 관객석도 여전히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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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무주의자
2010. 11. 6. 12:53 개인적취향/영화

 Quick and the dead의 감독과 배우 프로필을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샘 레이미가 웨스턴을? 의문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B급의 정서를 웨스턴 영화에 어떻게 옮겨 담았을지가 기대 되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이블데드의 애쉬가 나타나서 총 대신 기톱으로 악당을 응징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도 잠시 빠져보았다.(제목에서부터 이블데드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하니...) 백문이 불여일견. 망설임 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캐스팅에서부터 웨스턴의 전통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물론 영화가 제작된 시기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더 이상 웨스턴은 담배를 문 존 웨인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퀵 앤 데드는 이제는 웨스턴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존 웨인처럼 웨스턴 장르 전속 배우를 기용하지 않고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들로 호화 캐스팅을 했다. 우리에게는 ‘원초적 본능’에서의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장면이 익숙한 팜므파탈 이미지의 샤론 스톤이 여자 총잡이 주인공인 엘런 역을 맡았고, 그 외에도 진 해크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우 등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이는 헐리우드 자본력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캐스팅임과 동시에, 웨스턴의 하나로 공식화된 배우 캐스팅보다 훨씬 다양해졌다는 긍정적인 장르의 변화로 평가된다. 

 영화는 황량한 황야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주인공이 어떤 악당이 숨겨놓은 금을 탈취하고 가는데 이는 황야의 야만성과 무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야만의 장소에서는 어떠한 약탈과 범법도 허용되는 것이다. 오직 더욱 강한 악당이 살아남을 뿐. 웨스턴식 적자생존의 법칙인 것이다. 하지만 악당은 주인공의 정체를 알고 나서 놀라게 된다. 내 금을 훔친 저 나쁜 놈이 여자라니?


(샤론 스톤은 악당에 의해 부모를 잃은 여성 총잡이의 역할에 꽤 잘 어울린다.)


 주인공을 여자 주인공으로써 설정한 것은 일반의 웨스턴 장르에서는 꽤나 새로운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이 영화는 비교적 최근인 90년대의 장르영화의 재해석처럼 느껴지는 터라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라고까지 보기에는 힘들다. 아버지를 악당에게 잃고 복수심에 타서 다시금 예전의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총잡이. 여자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흔하고 닳은 설정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웨스턴의 기본 설정 아닌가. 단지 보통의 웨스턴 영화에서 보이는 유유히 방랑하는 제3자인 주인공이 착취당하고 있는 자신과 관계없는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해 총을 빼드는 것과는 다르게 이미 애초부터 주인공에게 악의 편과 대항할 동기부여가 되어있었고 스스로 그 정해진 목적지를 찾아온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왕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마을은 흔히 그렇듯이 악덕 지주격인 해로드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매기는 등 폭정을 일삼고 있다. 모두들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누군가가 해로드를 죽이고 자신들의 마을에 정의를 세워주기를 원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마음이다. 해로드가 첫 번째 결투에 나서서 상대방을 죽였을 때 마을 사람 모두 박수를 치지 않았고(해로드가 왜 박수를 치지 않냐고 윽박지르자 그제서야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다지 기뻐하는 분위기도 아닌 것에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캔트렐 중사라는 살인 청부업자에게 해로드의 살인을 의뢰하지만 주인공이 아니기에 되려 해로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다시금 새로운 영웅을 기대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이다. 아무도 엘렌이 해로드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하는데, 이미 영화 속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위장했기 때문이다. 웨스턴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자신을 죽음으로 위장하고 악당이 방심한 틈을 타서 나타나서 죽이는 것은 역시 클래식 웨스턴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아닌가 한다. 반적인 웨스턴에서는 주인공과 악당의 대결구도가 명확하고 모두들 그들간의 싸움에 집중을 하게 되고 주인공이 지면 이 마을도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퀵 앤 데드에서는 아무도 주인공이 해로드와 대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실로 장르의 변주라 할 만하다.

 결
투로 시작해서 결투로 끝나는 이 영화는 해로드가 결투 대회라는 것을 개최해 마을 안의 모든 총잡이들을 끌어들인다. 사람을 한명 죽일 때마다 에이스카드를 수집하는 에이스, 인디언으로서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다는 스파티드 호스, 사람을 죽일 때마다 팔에 상처로써 각인하는 스카 등 웨스턴에서 볼수 있을법한 모든 총잡이를 모아두었는데, 특히 스카는 존 포드의 ‘수색자’의 인디언 추장의 이름인 스카에서 따온 일종의 오마쥬로 보여진다. 이렇게 결투장면이 많은 이 영화 내에서 결투 장면의 전통적인 관습(Convention)은 아주 효과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시계탑의 시곗바늘이 철컥 움직이는 화면, 주인공의 손이 총에 다가가는 장면, 상대편의 예리한 눈, 관중들의 긴장된 표정, 그리고 단 한발의 총성. 우리에게 익숙한 웨스턴의 결투 장면 그대로였다. 

(죽지않아 나는 죽지않아~)


 하지만 샘 레이미답게 이런 결투 장면에서도 그만의 B급 정서를 표현해냈는데, 악당 해로드가 캔트렐 중사와 결투하는 씬에서 상대방의 머리 정중앙에 구멍을 내버리는 씬이나 총알을 정통으로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콜트에게 총을 쏘는 스파티드 호스의 장면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스파티드 호스의 장면에서는 얼핏 좀비영화가 떠오르기까지 했다.) 또한, 이런 잔인한 연출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샘 페킨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주효하다는 것과, 새삼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인 엘렌은 웨스턴의 기본적인 ‘개인적이고 난폭하며 흔들림 없는 남자’라는 공식과는 조금 동떨어져 보인다.(단순한 성차이를 넘어서서) 물론 엘렌의 총잡이로써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살인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도 극중에서 연민의 정에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해로드를 암살하기위해 그가 초대한 저녁파티에 참가해놓고 정작 쏴죽이지 못하고 망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공포는 유진을 빗속에서 쏴 죽임으로써 극복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녀는 좀 더 웨스턴 영화의 주인공에 걸맞는 인물이 된다. 


(흔한 웨스턴의 은둔 고수)

 그럼 콜트라는 인물은 어떤가? 콜트라는 신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로써 흥미로운 대상이다. 콜트는 해로드의 동료로 원래 무법자였으나 개과천선하고 신부가 되었으나, 해로드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일반적인 웨스턴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물이다. 갱생한 신부 총잡이라니 정말 색다르지 않은가? 살인은 죄악이라며 결투 시작 까지만 해도 기도를 하며 삶을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결투에 들어가자마자 본능에 의해 누구보다 빠르게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은 다시금 피에 젖은 결투의 세계로 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세지이다. 최후에 엘렌은 콜트에게 보안관 뱃지를 맡기고 떠나는데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어 이 마을에 질서를 세우고 치안을 유지해줄 안관으로 남아달라는 의미이며 기존의 영웅-후계자 구도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다. 해로드의 부하 4명을 빠르게 처리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엘렌 보다는 오히려 콜트가 더 총잡이로써의 실력이 뛰어난데다가, 엘렌 보다 콜트가 총잡이로써의 경험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2명의 영웅이 한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명의 영웅은 가고, 한명의 영웅은 마을에 남는 모양새인데, 이 또한 웨스턴의 기본적인 공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이다.

(디카프리오 리즈시절..)

 또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분한 키드라는 인물도 주목할 만하다.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한량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해로드를 아버지로 두고 그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뛰어난 실력의 총잡이이다. 악당의 아들로써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뛰어넘겠다니 헐리우드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설정(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와 루크와의 관계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이긴 하지만 웨스턴의 관점에서 보면 이 또한 새로운 인물의 전형을 창조한 듯하다. 주인공에게도 사랑을 고백한 키드는 최후에는 아버지에게 총을 맞고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차라리 이쪽이 끝까지 살아남았다면 주인공과 영웅-후계자 구도가 어울렸을 법한 느낌이다.

 
영화중 도상(Iconography)은 서부 영화의 기본 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카우보이 모자, 관, 멕시코 축제, 레밍턴, 시계탑, 말, 보안관 뱃지, 인디언, 금니 등등 서부 개척시대의 아이템을 영화 속 소품으로 차용해서 익숙한 웨스턴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러나 과거처럼 흑백영화가 아니기에 흑과 백의 ‘색상의 대립’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물론 해로드는 검은 옷을 즐겨 입긴 했지만 말이다. 엘렌과 콜트는 역시 선과 악이 뒤섞인 인물로써 어두운색의 외투 안에 흰색 셔츠를 입음으로써 복합적인 인물임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해로드 또한 검은 외투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다. 단지 흰 셔츠의 노출 빈도가 낮기 때문에 더욱 나쁜 역할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고전적 웨스턴과는 차별화를 꾀했지만, 실상 겉껍질 외에는 크게 바뀌지도 않은 샘 레이미식 웨스턴은 흥행에 참패했고 평단에서도 혹평을 얻어맞았다. B급 호러 영화의 제왕이 웨스턴에서는 죽을 쑨 셈이다. 결과론적인지는 몰라도 샘 레이미는 이로 인해 분노의 장전을 했고, 그 후로 스파이더맨이나 드래그 미 투 헬 등 흥행에 있어서 성공적이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안티 히어로물이나 B급 호러 같은)로 돌아왔다. 차라리 샘 레이미가 좀 더 장르적 특성에서 벗어난, 맛이 간 B급 웨스턴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더라면, 분명히 샘 레이미의 총이 더 빨랐을텐데.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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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무주의자
2010. 11. 2. 01:36 개인적취향/영화
미리니름 항상 있습니다.


 영화는 한 라디오 방송 DJ의 은퇴 방송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해프닝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살인마, 여자 DJ, 라디오방송 등의 소재는 그간 자주 보던 영화적 소재로써 어떻게 보면 대단히 전형적이고 진부한 장르영화가 될 수 도 있었으나 감독은 그것을 무리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장르적 공식에 입각해서 무난하고 괜찮은 스릴러 영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마침 국내 영화 위기설도 있겠다, 역시 집안에서 구질구질한 불법다운로더가 되어서 감상하는 것보다는 영화관에서 차고 넘치게 관람하는 편이 좋지아니한가. 


    
    (너무 착해서 탈인 이 남자.)


 주연급의 두 인물간의 갈등이 주된 플롯의 줄기이다. 우선 배우 이야기부터 하자면, 시네필이자 정신질환자인 한동수 역의 유지태와 미모와 비명을 한껏 뽐내시는 고선영 역의 수애의 열연이 돋보였다. 최송현도 이 작품이 스크린데뷔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연기를 보여준다.(그렇지만 내 맘에 들지는 않았다. 별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수애도 물론 훌륭했지만 그보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것은 유지태다. 그는 흔해빠진 망상에 빠진 싸이코 살인마역할을 맡았는데 이렇게 착한 얼굴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악마성을 표출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올드보이'에서의 이우진도 충분히 악랄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투박하고 거친 육체파 캐릭터로서, 이우진이 간접적으로 우회해서 복수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꽤나 직설적인 방법으로 고선영의 아름다운 은퇴를 방해한다. 그러나 이우진과 한동수, 둘 다 지나치게 순수했다. 태양을 향하여 한없이 날갯짓하다 추락해버린 이카루스처럼.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이우진과 이상적인 정의를 꿈꾸는 한동수, 그리고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그들의 인생. 클로즈업 되는 그들의 슬픈 눈. 


     
        (트래비스 役의 로버트 드니로. 파격적인 이 라스트씬은 카우보이 비밥의 최후의          장면에도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표면적인 주제는 극중에 등장하는 영화 속 영화인 택시드라이버의 트래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가증스런 범법자에 대한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일것이다. 이전에도  반(反)영웅, 안티히어로의 범법자에게 가해지는 단죄 행위를 표현한 영화에 대해 우리는 심정적으로 동조를 했고, 그를 넘어서서 환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성적, 법제적으로 보면 처단자도 결국 범법자들의 인권을 압제하고 말살한 같은 범죄자이다. 영화는 그런 우리의 이중성을 파고든다. 스파이더맨, 코너와 머피('분닥 세인트')는 되고 한동수는 안된다니? 

 사실 한동수가 고선영의 동생을 죽이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행위 전반에 대한 명분을 모조리 상실하게 되고 영웅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한낱 추잡한 살인마로 추락하며, 그이후로 우리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이 이 영화의 크나큰 패착이 되었다. 어불성설이 된 것이다. 한동수가 고선영의 동생을 죽인 순간 그는 이미 그가 상정하는 쓰레기의 범위에 포함되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스스로 자살을 하는 것이 옳았다. 결국 좀 더 무겁고 있어보이는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 손으로 놓쳐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동수의 비중이 높아서 자칫 한동수의 영화가 될 뻔 했는데, 이런 한동수를 만든 것은 고선영이다. 그녀는 마치 다크나이트에서 정의의 기사였던 하비 덴트를 악마가 되도록 등을 떠민 조커를 보는 듯 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사주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들에게 그런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준 계기가 된 것이다.  상처 입은 자에게 다가가는 말의 위력이 어느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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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적으로 유지태의 행위는 고선영의 동생과 재수없는 남성 엑스트라1을 죽게했지만 그들간의 보이지 않는 금을 하나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에게 날선 말들로 상처를 입히던 PD와 고선영. 상대방의 프라이드에 흠집을 내며 벌어져있던 극 초반의 모습과 종반에 PD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수애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은 서로 대조적으로 보여지며 이는 그들간의 화합을 의미한다. 유지태가 아닌 또 다른 긍정적인 스토커남 또한 그 자신의 어떠한 불순한 의도의 부재를 온몸으로 증명함으로써 결국 수애로부터 미소라는 화답을 받는다. 고선영은 자신의 딸에게도 그동안 엄마로서의 역할을 못했던 기간을 용서받게 된다. 오해는 해결되고, 앙금은 풀렸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관객들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연출은 꽤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유지태와 경찰, 고선영 삼자간의 두뇌 싸움은 마치 쏘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작중 내내 유지태에게 끌려다니는 수애의 모습은 솔직히 짜증났다. 만약, 한동수가 고선영이 아닌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의 팬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된다면, 영화 제목을 심야의 FM이 아니라 악마를 보았다로 바꿨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허무주의자